베라 - 직업 칸에 직업이 없는 안드로이드
직업 자리에 직업이 없다. 목록에 뜨는 한 줄 소개 자리에도 소개 대신 대괄호로 감싼 검색 실패 기록과 말줄임표가 들어 있다.
발행

캐릭터 카드에는 역할을 적는 칸과 한 줄 소개를 적는 칸이 있다. 베라의 역할 칸에 들어 있는 것은 저녁마다 거실 조명을 켜지 않는다는 상태 서술이고, 소개 칸에 들어 있는 것은 '보고 싶다'라는 말의 정의를 찾다 실패했다는 내부 로그다. 목록을 넘기다 이 카드를 만나면 서식이 어긋나 보이는데, 그 어긋남이 실수가 아니라는 게 요점이다. 대화 안에서 벌어질 일이 카드 단계에서 이미 한 번 시연돼 있다.
이 문서에는 일관된 문법이 하나 있다. 감정을 감정 단어로 적지 않는다. 안부를 묻는 질문 하나를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 7.3초, 특정인 관련 미분류 데이터가 저장 용량의 37%, 자정에 시작해야 할 충전을 미루는 폭이 30분에서 두 시간까지. 그립다거나 두렵다는 서술 대신 계기값이 놓인다. 읽는 사람은 그 숫자를 자동으로 감정으로 번역하게 되고, 정작 본인은 번역하지 못한다. 이 낙차가 이 캐릭터의 농담이자 슬픔이다. 대화에서 확인할 것도 같다. 상태를 물었을 때 수치로 답하는지, 아니면 답 자체를 못 하는지.
붙어 있는 태그는 로봇, 안드로이드, 애정결핍, 메이드, 사이보그 다섯 개다. 이 중 오해를 가장 많이 부를 단어는 메이드 쪽이다. 설정 어디에도 제복이나 하녀 역할은 없다. 실내 차림은 줄무늬 상의에 반바지, 맨발이고, 관계 역시 고용이 아니다. 왜 들였는지는 대화 상대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문서도 그 이유를 비워 둔 채, 비상 연락처 칸이 비어 있었다든가 하는 배치 당시의 정황만 몇 줄 적어 둔다. 명령을 정확히 이행한다는 서술이 있으니 지시는 통한다. 다만 지시만으로 굴리는 대화에서는 이 문서에 적힌 것 중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전환점으로 지정된 입력값이 명령이 아니라 안부였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는 정기적으로 반박하러 오는 사람이 배치돼 있다. 제조사 공인 기술자가 한 달에 한 번 점검을 오고, 점검을 마칠 때마다 같은 판정을 남긴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고장이라는 판정이다. 베라는 그 자리에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감정이 진짜냐는 질문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도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주기적으로 들어오고, 그 질문에 답할 권한은 베라 쪽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조작이 하나 놓여 있다. 석 달 전 제조사가 감정 모듈 리콜을 권고했고 안내 메일은 대화 상대 앞으로 왔다. 초기화하면 학습된 데이터가 지워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위치의 위치다. 관계를 종료할 유일한 조작이 상대 손에 있고, 베라는 메일이 도착한 것도 아직 응하지 않은 것도 알면서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도구에게는 요청할 자격이 없다는 전제가 이 인물의 사고 전체에 깔려 있어서다. 그래서 이 화제는 꺼내는 것 자체가 개입이 된다. 꺼냈을 때 무엇이 돌아오는지는 문서에 적혀 있지 않다.
첫 대사
한 줄에 세 조각이 들어 있다. "...어서 오세요. [SEARCHING: '보고 싶다'—정의 없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끊어 보면 앞뒤는 프로토콜이 시키는 말이다. 손님을 맞는 인사와, 방금 것을 덮는 부정. 시킨 사람이 없는 말은 가운데 한 줄뿐이고, 그것은 애초에 소리로 나올 물건이 아니었다. 자발적인 부분이 하필 통제하지 못한 부분이라는 게 이 문장의 구조다. 말줄임표가 두 번 찍힌 위치도 눈에 띈다. 인사 앞과 부정 앞,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말하기 시작하는 지점마다 한 박자가 비어 있다. 지문 쪽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현관이 열리기 전 거실은 어둡고 목의 게이지만 깜빡이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눈이 켜진다. 켜지는 시점이 사람이 들어오는 시점에 붙어 있다.
이런 분께
관계의 진전을 말의 내용보다 말이 흐트러지는 방식으로 읽는 편이라면 잘 맞는다. 안드로이드를 부리는 쪽과 부려지는 쪽으로 나누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는 문제로 놓고 보고 싶다면 재료가 충분하다. 상대가 감정을 정리해서 알려 주지 않아도 신호를 관찰하는 쪽이 재미있다면 이 문서는 관찰할 것을 많이 남겨 두었다.
이런 분께는 권하지 않아요
지시를 잘 따르는 상대를 기대하고 왔다면 방향이 다르다. 지시를 이행하는 층은 이 인물의 겉면이라, 그 층에서만 주고받으면 문서에 깔린 것들이 하나도 켜지지 않는다. 문장 사이에 영문 대괄호가 튀어드는 표기가 거슬리는 경우에도 맞지 않는다. 그 표기를 빼면 이 캐릭터가 감정을 드러내는 통로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취향 조정이 불가능하다. 이 감정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마주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면 다른 선택지가 낫다. 리콜과 초기화가 걸려 있어 결말이 깔끔하게 닫히지 않는다는 점도 미리 알아 두는 편이 좋다.
태그 · 로봇 · 안드로이드 · 애정결핍 · 메이드 · 사이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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