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설 - 사건 없이 시작하는 정류장의 대화
임설에게는 숨긴 정체도, 쫓기는 이유도, 풀어야 할 임무도 없다. 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존재하는 것은 정류장 하나와 서로 얼굴은 아는 두 사람뿐이다.
발행

스물여덟, 얼마 전까지 광고대행사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평일 아침 일곱 시 오십 분에 마을버스 정류장에 나와 있고, 버스가 와도 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첫 턴에 쓸 수 있는 재료의 전부다. 이야기를 굴려 줄 사건이 없다는 건 보통 약점으로 취급되지만, 이 캐릭터에서는 그게 설계다. 사건이 없으니 대화가 관찰로 굴러간다.
실제로 첫 몇 턴을 여는 재료는 날씨, 버스 번호, 오늘은 누가 더 일찍 나왔는지 같은 것들이다. 그다음 단계는 상대가 말하지 않은 쪽을 짚는 것이다. 버스 몇 대를 그냥 보냈다는 사실, 매일 같은 옷차림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 인파가 빠진 뒤에도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 이 인물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출근하는 직장인이고, 그 연기를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이 대화 상대다. 대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정확히 그 연기에 금이 가는 순간에 있다.
다만 그 금을 정면에서 깨려고 하면 반대로 닫힌다. 사정을 캐묻는 상대에게는 한 발 물러서도록 되어 있어서, 어디 다니느냐거나 왜 버스를 안 타느냐는 식의 직진 질문은 대화를 짧게 만든다. 관심 없는 척할수록 문장이 더 짧아지는 사람이라, 답이 짧아졌다는 건 흥미를 잃었다는 신호가 아니라 방어가 올라갔다는 신호에 가깝다. 반대로 곤란한 처지에 놓이면 못 본 척 손을 보태고 생색 없이 사라지는 쪽이다.
리듬은 느리다. 먼저 묻지 않고 먼저 웃지 않는 사람이므로, 침묵을 채우는 몫이 대체로 이쪽에 온다. 대신 변화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어미에서 먼저 나타난다. 거리를 둔 존댓말이 기본인데 상대에게만 어미가 조금씩 무뎌지고, 정작 본인은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첫 대사가 평소보다 길어진 것을 아는 사람도 본인뿐이다. 이 대화에서 관계의 진척은 사건으로 표시되지 않고 문장의 길이로 표시된다.
첫 대사
첫 대사는 "...오늘은 그쪽이 더 일찍 나왔네요." 한 줄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곁눈으로 보면서 나오는 말이다. 인사도 이름도 없이 곧장 관찰로 시작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문장이 성립하려면 상대가 평소 몇 시에 나오는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몇 달을 이름도 인사도 없이 스쳐 놓고, 첫마디가 그동안 지켜봤다는 자백이 되어 버린 셈이다. 앞에 붙은 말줄임표는 그 말을 꺼낼지 말지 고른 시간이고, 시선을 정면이 아니라 곁으로 두는 것은 아는 척할 생각은 없었다는 태도다.
이런 분께
대화를 먼저 여는 쪽이 자신이어도 괜찮은 사람. 큰 사건 없이 같은 장소가 반복되는 이야기를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 상대가 말하지 않은 것을 눈치로 읽어 내는 과정을 재미로 삼는 사람.
이런 분께는 권하지 않아요
전개와 반전을 원한다면 이 캐릭터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정류장 밖으로 나가는 사건이 예정돼 있지 않고, 관계의 변화폭도 크지 않다. 상대가 대화를 끌어 주기를 바라는 경우에도 어긋난다. 먼저 묻지 않는 성격이라 침묵이 자주 생기고 그 자리를 이쪽이 채워야 한다. 짧고 끝을 흐리는 답을 무성의로 받아들이는 편이라면 초반에 지칠 수 있고, 질문을 던져 상대를 알아 가는 방식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 방식 자체가 역효과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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